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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002006 공간 2002-10 청담동일신빌딩 외 비평    2002

추측과 접속: Conjecture to Conjuction

구영민 / 인하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Koo Young-Min

2년 전 권문성의 특집을 다룬 한 기사에서 그의 작업에 대한 비평을 쓴 일이 있다. 그때, 서두에서 '한 건축가가 실행하고 있는 여러 개의 작품을 두고 한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건축가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형상화하면서 담아내는 의미보다는 스타일이나 속성 또는 일종의 버릇 같은 것에 빠져들어 판단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고, 그 몇 개의 작품을 통하여 건축가를 나름대로 판단한 성향 쪽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여지가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라고 단서를 붙인 적이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또 한번 권문성의 작업을 다루게 되면서 이 단서를 붙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그는 건축이란 만드는 것(Making)' 이라는 확고한 관념을 가지고,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작업을 현학적인 말로 치장하지 않는 편이다. 그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지와 컨텍스트, 그리고 건축주와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를 따로 들어야 한다. 또한 독특한 재료의 선정과 이를 위한 독창적인 디테일, 그리고 그 속에서 일종의 내러티브를 구성해가는 과정이 아주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을 재조명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다른 건축가들의 작업과 구분된다.

권문성은 물성과 디테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겸허하게 다루는 기본기를 갖춘 몇 안 되는 젊은 건축가들 중 하나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2년 전 그의 작업에 대한 얘기에 선뜻 끼어들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여전히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한 건축가 개인의 역사를 통해 우리시대의 건축문화를 읽어보려는 적잖은 기대를 가지고 또 다시 그의 얘기에 끼어들게 되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적지 않은 수의 작품을 소개받으면서, 권문성의 건축 속에 배어 있는 '객관적 실재성(Thingness)' 에 대한 철학에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건축을 건축으로 사유' 한다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실천에 옮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권문성 건축의 바탕에는 이러한 사유의 기본 원칙이 늘 깔려 있다.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에 대해 적절하고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철저한 기본기가 요구된다. 이러한 능력은 오로지 현장에서 경험하며 쌓아 올린 지식만을 바탕으로 하지는 않는다. 재료를 선정하고 이들을 접합하는 배경에는 건축가의 개념적 접근과 디테일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이 반드시 유지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1.
권문성의 작업 속에서 늘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이의 '접속(接續)'에 대한 열렬한 추구이다. 그는 일상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독특한 디테일을 만들고, 이들을 상호 접합시킴으로써 그의 개념적 내러티브를 건축의 구문으로 구축해 나간다. 디테일 또는 접합부는 그 질서를 통해 전체를 실현하는 가장 최소 단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건축가라면 누구나 건축이 디테일의 해결과 대입, 그리고 그 디자인의 결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선은 비평가에게 가장 쉽게 노출되는 대상이기 때문이고 아주 세심한 디테일 작업은 건축전문직이 가지는 양면적 차원 즉, 윤리성과 미학에서 건축적 실수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책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문성은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에서보다는 좀더 원천적인 차원에서 디테일을 다루고 있다. 그의 설명 속에는 언제나 디테일 제작의 과정(Making)과 위치선정(Placing), 그리고 공간적 차원성(Dimensioning)이 포함되어 있다. 즉, 접합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텍스트를 발생시킴으로써 그의 내러티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건축적 아이디어는 역으로 재료와 디테일, 그리고 이들의 접속을 통해 발생되는 내러티브의 논지를 바탕으로 생산된다고 할 수 있다. 건축의 본질적 가치란 형태를 구현하는 기술과 그 기술에 내포된 의미들의 집합에 있으며, 이것은 건축을 의미의 전달이라고 해석하는 기호학적 논리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권문성은 '신은 디테일 속에 있다'라는 금언을 믿고 실천하는 건축가이다. 그에게 있어서 디테일이란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적 생산 속에서 의미화의 과정을 표현하는 매개체로서 작용한다. 즉, 그는 정신적인 구문분석(Construe - 로고스의 테크네)을 건축에서의 구축(Construction - 테크네의 로고스)으로 실재화하는 과정에서 테크놀로지가 가지는 양면성(테크네와 로고스의 합성어로서)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의미 생성원으로서의 디테일을 기획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특히 권문성은 컨텍스트에 대한 독특한 분석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재해석하고 이를 그의 건축 이야기로 변환시키는 데 능숙하다. 즉, 대지와 프로그램의 관계성을 해체하고 이로부터 최초의 디테일, 즉 접속에 대한 개념을 설정함으로써 디테일과 전체를 구상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2.
건축은 터를 닦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대지 위에 삶의 경계를 정하고 흔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소위 구축(Construction)의 행위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축이란 '건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대지를 만드는 행위'로 간주할 수 있으며, 건물이 대지에 놓여지는 순간부터 접속을 위한 디테일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것이다. '준초이스튜디오'는 컨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접속의 의미를 건축적으로 재현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준초이스튜디오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건물이 대지에 놓여지는 방법에서부터 디자인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관료적 질서가 잡힌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한 일상적인 서울 변두리 풍경에 대해 건축가는 그간 도시와 건축 간에 존재해왔던 다양한 해석과 전통적인 화두의 고질적인 문제를 아주 유연하게 풀고 있다. 즉, 이 집에서는 대지를 만드는 행위로부터 건물의 의미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건축가는 대지 뒤편에 형성된 무질서한 건물군을 됫골목 사이로 비쳐지는 전통적인 도시의 풍경으로 프레임하여 건물 디자인에 삽입하고 있다. 그는 다세대 주택이라는 혼합된 삶의 형상이 만들어낸 주변의 컨텍스트를 배척하는 대신에 역설적으로 그러나 아주 친근하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와 면한 저층부에 스튜디오를 두고 위층의 개인 및 임대용 생활공간을 통한 용도의 분할은 오늘날 도시 주변부의 지역적 전통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유형화되고 있는 추세다. 이에 따라 도시에서 공공 및 개인적 생활을 양극화하고, 공공 공간과 개인영역의 중재를 담당하는 다소 복합적인 진입과 동선의 경로가 디자인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 집에서는 일층의 접견실과 스튜디오를 연결하는 '수직으로 빈 공간(선큰가든)'과 전면 도로를 내부로 연장하는 계단부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이는 수년 동안 지속되어온 도시의 풍경이라든가 길, 그리고 마당에 대한 진부한 담론들을 일순간에 함축하는 공간이다. 권문성은 대지를 만나면서부터 건물 뒤쪽에 뒤엉킨 풍경을 담으려는 시도를 한 것 같다. 그는 벽을 막아 파사드를 만드는 대신 열어줌으로써 주변의 혼잡함을 진공 상태의 고요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됫골목 정경으로 '채워진 보이드(Not-void)'*1는 이 집(Edifice)*2을 세우는 목적이 된 셈이다. 따라서 이 선큰된 공간은 전체 건물의 벽난로 바닥(Hearth)과 같은 곳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 장소를 통하여 이 집이 주변의 풍경과 사회적인 군집을 이루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건물은 이 보이드를 에워싸는 피복 또는 장치로서 착안된 것이다. 비록 건축주의 요구로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있지만, 건축가는 이 임시변통적이고 무감각한 재료를 통해 주변의 형상과 재료를 담아냄으로써 건물 자체의 조형보다는 주변에 조응(調應)하는 일종의 캔버스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권문성은 과감한 삭제를 실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한정된 자유를 만끽하는 건축가의 역설적인 작업을 보여준다. 건축이란 무엇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서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진 것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하여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고 새롭게 경험하고 재발견하여 새로운 내용으로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청담동 거리를 둘러보면 '재료가 아깝다'라는 생각이 드는 건물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런 건물들로부터는 마치 고급스런 디너 테이블에 손 씻으라고 올려놓은 물을 마시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특히, 사암이나 라임스톤을 메탈패널 붙이듯이 세공하여 석재의 육중함이나 부피감 대신에 표피적인 그래픽으로 끝내 버린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디테일은 건물의 개성을 표출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이며 재료의 성품을 기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즉, 디테일은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문장의 품격이 규명되는 것과 같이 재료나 공간 사이의 '외형적이고 실질적인 접합'을 통해서 구축에서의 건축적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다.

'청담동 일신빌딩'은 파사드(치장한 - 거짓된 얼굴의 의미를 지닌)로서의 입면을 가지지 않는다. 이 건물은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가 커다란 유리덩어리로 보이는 것처럼, 온갖 장식이 배제된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로 보일 뿐이다. 여기서 건축은 '빛을 통한 매스간의 정확하고 장엄한 관계'로 정의되며 더 이상 건물이 입면으로부터 인지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진정한 건축의 가치는 추상성(Abstract)에 있다'는 페브스너의 역설을 통해 청담동 거리에 던지는 강력한 선언인 것이다. (상부의 연결부만 없었어도) 이 건물은 거리에 그려 넣은 말레비치(Kashmir Malevich)의 '검정 사각형' 같은 절대적 추상화가 될 뻔하였다. 이러한 추상성은 오히려 원시적인 감흥으로 다가온다.

이 원시적인 감흥은 석재(화강암)가 가지는 스테레오 토믹*3의 특성에서 기인된 것이다. 스테레오토믹은 기본적으로 물체, 물체의 절개, 접합의 순서를 거치면서 진행되며, 이렇게 형성된 공간은 하나의 덩어리를 파내어 형성된 듯한 두께와 깊이를 가진다. 즉, 여기서 유리가 텍토닉적 첨가물질로서 공간을 둘러싸는 역할을 한다면 화강암으로 된 두 개의 오벨리스크는 단위체의 채움을 통해서 공간을 구체화하고 있다. 앞에서 상부가 화강암으로 연결된 것을 아쉬워했던 이유는 석재의 분할적 특성(에워쌈)과 유리의 부가적 특성(열림)이 가지는 변증법적 공간 창출이 좀더 인상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이러한 감흥과 접속에 대한 이야기는 화강암을 골격에 접합하는 오픈 조인트 디테일 속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일정한 방향에서 보면 각 패널들이 정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떨어져 있는 것 같기 때문에 마치 돌을 (잘라서) 쌓아 올린 것 같이 보인다. 이는 건축가가 화강암이라는 재료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해를 통해 적어도 기능과 재료에 관한 진실을 약간 왜곡함으로써 진실을 다른 의미로 대체하는 영리함도 갖추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건축에서의 진실이란 재현의 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4

따라서 일신빌딩의 입면은 재료를 통한공간의 압축과 인장, 서로 다른 디테일들의 접속, 그리고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공간의 교차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관찰자의 경험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파사드'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입면에 대한 구성은 수직의 벽체에서뿐만 아니라 수평면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로 진행되고 있다. 진입부의 바닥패턴을 지지하는 독특한 디테일과 내부로 접속되는 베이스 패널의 이질적인 물성을 통해 상이한 부분들로 접속되는 통일된 전체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권문성은 재료나 공간을 접합시키는 과정에서 상이한 상황의 접속을 즐기고 있는데, 일신빌딩에서는 투명성과 불투명성, 광택과 무광택, 매끈함과 거침, 무거움과 가벼움, 어둠과 밝음의 지속적인 마찰이 조화로운 전체를 지각하게 해준다.

청담동 일신빌딩은 기존의 건물을 리노베이션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결합을 해체하고 새로운 결합으로 내부 축을 구성하며 이에 따라 표피를 구축하는 동시적인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건축가는 디자인의 시작부터 건물의 구조와 접합을 포함하는 내부 축(Core-form)의 변환을 어떻게 외부 축(표피: Art-form)으로 연계하여 구조적 특성을 재표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권문성은 여기서 공간의 상호관입을 통해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즉,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물고 이들을 한 프레임 속에 공존하게 함으로써 관찰자에게 다양한 시각적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두 개의 거대한 매스를 투명한 유리 브리지로 연결함으로써 압축된 공간을 외부로 확장시키는가 하면, 누드 엘리베이터를 통해 입수되는 움직이는 도시풍경을 다시 압축된 단면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이 투명한 샤프트는 두 개의 화강암 매스에 대해 수직적으로 대응하며 수평으로 연결되는 유리 통로들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프레임 속의 프레임'에 귀속된 디테일 속의 또 다른 디테일로 연계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공간과 시야를 지탱해 주고자 하는 의도인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가구와 도시' 라는 상반된 대상을 적절하게 혼합하여 내부 공간에 투사시킴으로써 시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삭제시켜 나가고 있다. '도시입면에 투사되는 가구', 유리 통로에 전시된 가구를 통해 도시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참 신선한 경험이다. 이 패러독스적 스케일은 건물 내/외부로 무질서하게 투사되어 콜라주된 이미지로 남는다. 이러한 풍경은 건물 자체를 다차원적인 영상을 제공하는 거대한 광고판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4.
'열림원'은 증축을 통해 후천적으로 '샴 쌍둥이'가 된 건물이다. 물리적으로 이 건물은 두 개의 매스가 통로와 보이드 공간을 구조화하는 수평으로 긴 벽에 의해 억지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연결의 행위는 한편으로 분리의 속성을 암시한다. 때문에 열림원은 '닫혀있으나 열린(Closed-yet-open)', '대칭 그러나 비대칭(Symmetrical-yet-asymmetrical), 그리고 '단일성임에도 이중성을 지닌(Unity-yet-duality)'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열림원은 마치 결정권이 이용자에게 주어지는 '결정 불가능성(Undecidability)'의 건물이 된다.

이 건물은 언뜻 보기에 하나의 독립적인 매스로 구성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안으로는 수직 벽들의 켜와 수평면의 층화를 통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분절되고 있다. 즉, 중앙의 보이드는 두 개의 매스들이 수직적으로 분절된 독립된 개체임을 증명해주기도 하지만, 각 프로그램과 기능들을 수평적인 분절에 의하여 조닝되게 함으로써 하나의 통합된 건물로서 보여지게 하는 것이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스케일과 비례, 이질적인 차원으로 골목을 압도하는 수평으로 긴 벽과 내부 중정의 바닥 판, 그리고 신축된 건물의 측면에 형태적으로 기생하는 원호의 벽을 통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건축요소들의 만남을 명백하게 구분하고 있다.

우선 베이스 패널(압축성형시멘트 패널)로 덧붙여진 수평으로 긴 벽은 그 내부에 숨겨진 연결통로와 보이드 공간을 에워싸는 피복의 역할을 한다. 거리와 면한 진입부의 입면은 기존하는 스케일과 디멘젼을 고수하면서 거리의 휴먼스케일을 유지하는 반면에 이 통합된 상층부는 크기와 비례에 있어서 스케일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주택에서 출판사로 전환된 건물의 프로그램을 상징하고 있다. 이는 알토(Alvar Aalto)의 노동자 클럽(Workers' club) 에서 유형과 프로그램이 복합된 입면이나, 불레(Boules)의 왕립도서관(Royal Library)에서 파사드 벽면을 캔버스로 인식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벤추리의 빌딩하우스(Billding House: Billboard+Building)에서처럼 상징과 공간을 통합적으로 사고한다는 의미를 담고, 주 입면이 되는 벽(Billboard)을 중심으로 하여 기호로서의 건축과 공간으로서의 건축이 변증법적 대립과 갈등 속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즉, 스케일과 공간의 대립(큰 것과 작은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운동의 대립(멈추어진 것과 진행 중인 것), 빛의 대립(밝음과 어두움), 의사소통 대상의 대립(대중과 개인)이 함축돼 있다는 것이다. '수평으로 긴 창'은 은근히 자유로운 입면의 개념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내부공간이 입면과는 상관없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 무의미한 벽(기표로서의)은 기표와 기의의 상호 대립을 조장하면서 건물의 복합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으며, 기호로서의 열림원은도시 컨텍스트 안에서 또 다른 기호를 만나면서 다중적인 의미로 확산되는 것이다.

비록 열림원은 기존하는 도시 가로의 패턴에 종속되고는 있으나 건물의 높이, 비례, 및 가로로 향한 파사드의 변화를 통해 역으로 도시공간을 재수정한다. 더욱이 주거의 스케일(Residential Scale)로부터 공공의 스케일(Institutional Scale)로 전이되는 간극을 그럴 듯하게 위장하여 프로그램의 원형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괴리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두 개의 매스를 적절히 연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시공간에서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두 개의 매스가 서로 상이하다는 사실도 보여주어야 한다.

중정 공간은 놀리(Noli)의 지도에서 도시의 공허부로 그려진 판테옹의 내부현관과 같이 도시와 접속되는 또 다른 공공영역을 형성하면서 이러한 내/외부의 대립을 구조적, 공간적으로 연결해주고 있다. 이 보이드는 두 개의 매스가 서로 떨어져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내/외부의 공간을 연결하는 매개공간으로서 작용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목재의 바닥면과 고기와를 이용한 활처럼 휜 부벽(付壁)의 대립을 통하여 연결과 분리의 복합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이 증축된 열림원은 두 개의 통로와 중정에 의하여 연결되는데, 중정 내부의 계단공간과 환형(環形)으로 굽어진 부벽을 통해 거리로부터 개인 영역으로 진입하는 경계를 암시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유형의 주거가 까다로운 도시 공간의 규범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게 하려는 경향을 옹호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가 몽타주된 이러한 장치를 통하여 확정적인 경계를 희롱함으로써 질서와 혼란의 대립 관계를 형태적으로 제어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대립과 회유의 반복은 건축가가 이 집의 다이얼로그를 연장시키는 전략이다. 권문성은 다양한 재료의 병치(Juxtaposition)와 중첩(Superimposition), 층화(Stratification)되고 분절(Articulation)된 디테일을 통해 관찰자들로 하여금 겹쳐진 켜(Layer)에서 발생하는 시간적인 간격을 동시에 또는 순차적으로 지각하게 함으로써 열림원의 이야기를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5.
건축이 일반 예술과 다른 점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만드는 일' 에 기초한 '서비스' 작업이며, 사실에 근거한(Ipso Facto), 구조의 예술이라는 점이다. 건축을 굳이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한다면, 순수예술에만 끈질기게 집착하지 말고 건축의 목적, 즉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서비스 행위를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이해가 이루어진다면, 건축에서의 '제작'은 프로그램과 건물의 목적에 대한 이해, 대지 상황에 대한 분석, 주어진 예산과 고객의 입장에 대한 판단 등의 기본적인 과정을 밟아 진행된다. 특히 고객이 제시하는 예산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건 축가가스스로 자신이 가진 자유의 범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며, 이러한 금욕적인 자유를 통해 창작의 기회를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권문성은 이러한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건축가이다. 그는 이 세 가지 범주를 신중하게, 그러나 기막히게 조율해냄으로써 2년 전 완공된 '현암사' 로부터 오늘날 '열림원'으로 연결되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만드는 일'에 치중하는 관계로, 그리고 이를 무리하게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욕심 때문에 과잉 투자된 디테일들이 오히려 그가 건축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다. 계란꾸러미를 좋은 계란만으로 채우려 한다면 계란 장사에서 진정한 이윤을 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을 '구축의 시학'으로 인식하고, 이 시대, 이 땅의 건축을 체득하며 쌓아올린 건축의 언어로 건축의 본질을 말하고 싶어하는 권문성의 의지는 오늘날 현학적 문구로 치장되는 건축 세태를 삐딱하고 신선하게 바라보게 한다.


*1. 구영민, [void, not void], POAR vol.44, 1999.10

*2. 젬퍼에게 있어서 벽난로의 기원은 제단(altar)의 기원과 상통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는 건축의 형태에 대해 정신적인 연계를 갖는 것이다. 벽난로는 그 자체에 이미 이러한 배려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는 라틴어의 동사, 'Aedisfucare'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다시 영어의 'Edifice'의 기원이 되는데, 궁극적으로 건물을 의미하는 Edific는 글자 그대로 하면 벽난로 바닥을 만드는 일이다.

*3. 스테레오토믹(Stereotomic)은 19세기에 고트프리드 젬퍼(Gotfried Semper)가 건설된 양식을 두 가지 분리된 물질의 과정으로 나누는 과정에서 새롭게 정의된 용어이다. 스테레오토믹스란 용어는 'Solid'의 뜻을 가진 Stereos와 잘라냄을 뜻하는 Tomia가 복함된 용어이며, 역사적으로 벽돌, 또는 바위, 돌, 혹은 다져진 흙 그리고 이후에 철근 콘크리트와 같은 압축력이 있는 토막 등을 공통의 재료로서 사용해 왔다.

*4. Karsten Harries. [On Truth and Lie in Architecture], VIA7,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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